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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one was watching him.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Rock n Roll Girl. 지금 듣고있어 Smells like teen spirit. #스타벅스공모전
2개의 캔버스가 세트인 작품. 저는 인물을 주로 그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피지컬 작업과 전시를 병행하며, 사이버펑크 세계관에 뿌리를 둔 다양한 개체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빨강’이라는 주제 아래 '붉은 네온 시티'를 배경으로 한 캐릭터들을 창조해내며, 이들 간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최근 단체전에서 전시한 그림이며 ‘빨강’이라는 공통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걱정이,많아도,천천히,괜찮아> 시리즈 중 Slowly KEEP GOING by DINGS #그린피스공모전
The tower of card 50x50cm acylic on canvas 2024
집은 나와 나의 가족들이 함께 부대끼며 겪는 기쁨과 슬픔, 성장과 배움, 고민과 갈등 등 나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는 공간이다. 즉,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아지트인 것이다. 따라서 집 안을 들여다보면 그의 가치관과 문화를 알 수 있고, 은밀한 내면세계까지도 엿볼 수 있다. 이런 의미를 바탕으로 본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집은 특정 가치관과 자아를 지닌 개개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여럿과 서로 관계를 이루며 더불어 함께 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그 존재 의미를 갖는다. 아름다운 사회는 사람들과의 배려와 존중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가 다양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집의 색과 구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행복한 삶이 더 이상 나에게서 느껴지지 않을 때, 관계로 인한 피곤하고 지친 삶에 본인의 작품으로 힘을 주고 싶다. 무수한 관계 속에서 외롭고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선물하고 싶다. 보다 나은 관계 맺기를 꿈꾸며, 개개인으로 표현되는 집으로 희로애락이 담긴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작업에 담아보고자 한다. -작가노트중-
#아크릴화 #원화 #캔버스화 #풍경화 #노인 시장은 삶이 응축된 공간이다.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가지만, 그 모습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나는 그들을 서양 귀족의 화려한 복장으로 치장해, 노동과 생존의 현장 속에서도 빛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 세상에 스스로의 의지로 떨어진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생존을 위해 일하고, 돈을 벌며 경쟁 속에서도 행복을 찾고, 일상을 만들어간다. 시장 속 노인들은 그 긴 여정을 지나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삶을 반복하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비위생적이고 혼잡한 시장은 동시에 따뜻하고 정겨운 공간이다. 그곳에는 인생의 흔적, 세월의 무게, 그리고 삶의 온기가 공존한다. 그들의 삶은 찬란하다.
푸른 하늘과 초록 능선을 배경으로 솟아오른 세 개의 분홍색 덩어리는, 사람의 형상을 닮았으면서도 개별 인물로 느껴지지 않는다. 층층이 말려 올라간 살결 같은 주름과 과장된 부피는, 몸이 아니라 감정이 응집되고 부풀어 오른 결과물처럼 보인다. 텅 빈 흰 눈과 길게 벌어진 새까만 입은 어떤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듯하지만, 그 안에서 실제로 어떤 소리가 터져 나오는지는 끝내 들리지 않는다. 표정이 분명할수록 감정은 오히려 더 알아볼 수 없게 흐려지는, 과잉의 지점이 화면 전체를 지배한다. 배경의 하늘을 가득 메운 짧은 선과 소용돌이 형태는, 내부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불안과 동요를 시각화한 듯 끊임없이 회전한다. 초록 언덕의 반복되는 곡선은 분홍색 몸의 주름과 서로를 반향하며, 이 비현실적인 존재들을 현실의 중력 안으로 끌어당긴다. 아크릴과 오일 파스텔이 만든 두터운 표면은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살결의 감각을 남기면서도, 동시에 이들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떠 있는 감정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Fat-2’라는 제목은 외형의 비만을 묘사하기보다, 감정과 관계가 한계치까지 부풀어 오른 상태를 가리킨다. 서로 기대지도, 완전히 분리되지도 못한 채 한 화면 안에 묶여 있는 이 존재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관람자는 이 과잉의 감정에 스스로를 겹쳐 보게 될 수도 있다. 멀찍이서 이 기묘한 비명을 구경할지, 아니면 그림 앞으로 다가와 그 무게를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일지, 선택은 천천히 시선을 머무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우리는 때로 생각을 강요받고, 감정을 강요받고, 취향을 강요받는다. 타인을 공감하는 로봇으로 개조하려고 하는 이들, 심지어는 세상의 모든 <T>를 <F>로 바꾸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감”이라는 아름답고 상호적인 단어가 왜 이토록 폭력적으로 사용되는가?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감추는 건 아닐까? 공감이 이렇게 폭력적일 때가 있었는가? #인스파이어드공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