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니스 - art.ness | 예술을 더 쉽고 즐겁게

Live Artfully 아트 큐레이션 플랫폼 아트니스(art.ness) 예술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예술적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해 보세요.

손으로 쌓아올린 세계, 이은정 작가 2026.01.06
자수는 종종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부분으로 발견된다. 요즘처럼 삶의 대부분이 자동화된 시대에 화폭의 대부분을 자수로 작업하는 이은정 작가의 경우는 흔하지 않다. 작가는 작품 한 점에 많게는 100시간 이상을 쏟고 있을 만큼 시간과 공을 들인다. 혼자만의 공간을 간절하게 꿈꾸는 시간에 만난 새로운 작업의 세계. 회화 작업을 했던 시간을 기초로 자수에 몰입하는 시간은 이은정 작가가 계속해 작업을 이어가는 동안 분명 유의미한 과정이 되어줄 것이다.
  • 설명
  • 작품

이나니스(Inanis)는 라틴어로비어 있음’, ‘공허’, ‘텅 빈 상태를 뜻한다. 이 단어가 내포한 의미는 피상적이지 않다. 이나니스는 무엇이 없다는 사실보다, 의미와 내용, 형식이 의도적으로 제거된 상태, 다시 말해 비워짐 그 자체가 하나의 조건이 되는 순간을 가리킨다. 고전 라틴 문헌에서 이 단어는 종종 무가치함이나 허무함의 뉘앙스로 쓰였으나, 중세 이후에는 철학적인 사유에서 존재가 결핍된 상태를 의미할 때 종종 사용된 단어다. 흥미로운 점은 이나니스가 어떤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남긴다는 데 있다. 비어 있음 이후에는 무엇이 남는가, 혹은 비워진 자리에서 감각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작가는 많지 않지만 삭제와 여백, 침묵을 통해 감각의 밀도를 구축하려는 태도, 다시 말해이나니스적인 접근을 작업의 핵심에 둔 사례는 종종 발견된다.

 

회화를 전공한 이은정 작가는 이러한 이나니스의 개념에서 출발해 이나리아(Inaria)’라는 고유한 세계관을 구축했다. 출산과 육아로 작업이 단절되었던 시기, 작가에게 필요했던 것은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아크릴 물감 대신 손에 쥔 것은 실이었다. 차갑고 즉각적인 물질이 아니라, 온기를 지닌 실을 한 땀씩 꿰매는 자수는 결과보다 과정을 먼저 허락하는 기법이다. 현대미술에서 종종 여성 작가들이 서사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천과 실을 사용하기도 한다. 소재가 가진 물성 또한 곱고 따듯하다. 반복되는 손의 움직임과 천천히 쌓이는 시간은 작업에 대한 조급함을 누그러뜨렸고, 이은정 작가는 그 리듬 안에서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게 실은 작품에 다채로운 질감과 깊이를 부여하고, 손의 감각과 시간의 축적이 응축된 공간의 모습으로 이나리아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휘돌아 흐르는, acrylic and embroidered fabric, 65.1x90.9cm, 2024

 

이은정 작가 

 

회화를 공부하던 시절, 주로 어떤 테마로 작업했나요?

여전히 정서의 결은 비슷합니다. 다만 그때는 패턴이나 공간에 대한 탐구가 더 즐거운 시기라서 안과 밖을 뒤섞거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작업들 그리고 이상적인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했어요. 저라는 사람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라,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 늘 이상적인 공간을 꿈꿔온 듯합니다.

 

자수를 선택한 과정에서 물감으로부터 허전함이 느껴졌다고요. 재료 선택의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어떤 감각에 대한 거리감이었을까요?

회화작업을 할 때도 손이 많이 가는 세밀한 작업을 했어요. 표현의 용이함을 위해 유화가 아닌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고요. 아크릴의 매끈한 질감이 다층의 공간이 중첩된 작업을 하는 저에게 약간 아쉬움이 느껴지는 소재였다고 할까요? 비슷하게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지만 자수 기법을 접목한 이후로는 실이 가진 밀도 덕분에 한층 화면이 풍요로워진 것 같아요. 붓이든 바늘이든 쌓아 올리는 과정은 비슷하지만, 실이 가진 질감은 독보적이니까요. 저에게 적합한 재료였다고 생각합니다.

 

자수를 시작한 시기가 출산 후 육아하는 기간과 맞물려 있어요.

자수는 감정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이유가 아닐까요? 스스로가 사라져버리는 기분이 들 때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이 불안과 우울을 치유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실이 가진 따듯한 질감과 물성, 그리고 계속해 손을 움직이는 시간이 무너진 것들을 차근차근 쌓아올리는데 적합한 재료가 아니었나 싶어요.

 

자수의 속도는 그 시기와 어떻게 조화를 이뤘을까요?

처음에는 절대적으로 작업시간이 부족해서 의식적으로 제 안의 여러 역할에 턴오프 스위치를 만들었어요. 혼자 있는 시간은 되도록이면 주위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저는 루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변화에 민감해서 지금은 규칙적으로 작업시간을 정하고 사용하는 편입니다.

 

영원의 순간, acrylic and embroidered fabric, 45x87cm, 2024

 

특별히 프렌치 자수를 택한 이유가 있나요?

자수 기법을 처음 사용했을 때, 특별히 기법을 배우지 않았어요.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때 그때 표현하고 싶은 소재에 따라 기법을 찾아보거나 연습했어요. 프렌치 자수를 선택했다기보다 더 적합한 표현 방법을 택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네요. 그래서 더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자수 기법을 사용하면서 저만의 방식으로 다듬어진 측면도 있고요. 여기에 회화와 어우러지는 화면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나니스라는 개념에서이나리아라는 세계로 확장된 지점이 궁금합니다. 공허는 보통 결핍으로 읽히는데, 작가에게 이 세계는 어떤 상태를 의미하나요?

결핍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그 결핍과 불안에서 작업이 시작됐고요. 보통 비어있음과 결핍이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저는 오히려 그것이 작업의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하거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반복적이고 지루한, 수를 놓는다는 행위로 만들어진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소소한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지금 시대에 정직하게 쌓아올린 공간을 접하고 잃어버린 정서를 다시 소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장소성을 갖는 화폭이 대부분입니다.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이 있나요?

잠시 작업을 멈춰야 했을 때, 저는 혼자만의 세상으로 도망가고 싶었어요. 오롯이 저로 있을 수 있는 장소를 꿈꿨습니다. 그때의 감정이 투영되어 등장인물 없이 장소성이 부각된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불안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심리를 이미지화 한 문을 비롯해 계단, 조각배, 검은 구체, 자연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와 쉴 수 있는 장소 등이 주요 요소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 모든 것을 아우릅니다. 물은 생명을 품는 근원적인 요소로 모든 것이 녹아들고 새롭게 변형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이고, 또 자유로운 화면 구성에도 많은 영감을 주는 요소입니다.

 

자수를 사용하는 여성 작가에게 종종여성적이라는 해석이 따라붙습니다. 작가는 이런 프레임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저는 여성적이라는 해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육아로 인해 제 작업방향이 크게 바뀌었듯이 여성 작가라서 겪는 많은 상황들이 있어요. 성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보편적인 인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작업은 작가의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매우 정직한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계절의 변화나 심리적인 변화가 의식하지 않아도 작업 속에 그대로 드러나니까요. 게다가 자수는 오래전부터 여성들이 많이 놓았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덕분에 저는 많은 여성 감상자 분들과 비슷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고 이것은 매우 큰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회화로 돌아갈 가능성, 또는 자수보다 회화 면적이 넓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요?   

매번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늘 방식을 고민합니다. 자수와 회화부분의 면적 배분도 그렇고요. 아무래도 색면으로 처리하는 부분이 많으면 절대적인 작업 시간이 줄어들 테니 유혹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제 기준에서 회화로 표현했을 때 장점인 소재가 있고 자수로 표현했을 때 더 적합한 소재가 있어요. 눈 건강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데, 신체적으로 불편함이 생긴다면 작업 방식도 자연스럽게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요?

 

아트니스에 업로드 된 작품 중에 판매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 있나요? 그 작품은 얼마나 시간을 써서 완성했을까요?

모든 작업에는 그만큼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해요. 판매가 되면 기쁘지만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구매하고 사랑해주시는 컬렉터 분들이 없다면 작업을 이어가는 동력이 약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아트니스에 업로드 된 작품들 모두 아끼는 작품들이지만 <꿈결 속에> 소품 2점은 변형 캔버스라 액자제작까지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소품이지만 제작시간은 한 점당 100시간 정도는 쓰지 않았을까 싶어요. 좋은 컬렉터를 만나 판매된다면 매우 기쁘겠지만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 아쉬움이 남을 것 같습니다.

 

 

꿈결속에, acrylic and embroidered fabric, 25.5x30cm, 2023

 

 

황금가지와 노래하는 숲, acrylic and embroidered fabric, 80.3x116.8cm, 2025

 

 

별이 내리는 정원, acrylic and embroidered fabric, 72.7x90.9cm, 2023

 

달 아래 일곱 봉우리, acrylic and embroidered fabric, 97.0x162.2cm, 2022

 

 

 

꿈속으로, acrylic and embroidered fabric, 97.0x162.2cm,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