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명
- 작품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고 이제는 누구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촬영 장비와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시각 매체들은 한계가 없는 세계를 확장한다. OTT를 비롯해 기술과 자본이 응축된 작품이 선사하는 시각적 충격 앞에, 이보다 더 큰 자극이 있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시대에 창작자에게는 질 좋은 동기가 절실하다.
잡지 사진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민희기 작가는 인물, 풍경, 식재료 및 산지 취재 등 라이프스타일에 기반한 광고 사진 촬영을 해왔다. 최근 몇 년 사이 개인 작업에 시간을 쓰고 있다. 작가는 캘리포니아의 사막 데스밸리를 바이크로 횡단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보고 있는 풍경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커리어를 쌓은 20년간 산지를 취재하며 사진에 담았던 식재료를 수확하는 모습들도 기후 변화로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아름다운 풍경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이는 작가를 움직이게 했다.
작가가 산으로 간 이유는 작가 스스로 끊임없이 자극을 찾아온 결과다. 처음에는 오프로드용 사륜구동과 산악바이크로 산을 올랐고, 이후 두 다리로 등반하기 시작했다. 물리적 강도는 높아지고, 관찰자의 시선은 느려졌다. 기존에 볼 수 없던 풍경을 담아보고자 더 높은 산으로 향했다. 그렇게 작가는 2022년 히말라야에 올라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마주한다. 실재하지만, 실재 같지 않은 풍경을 빛으로 채집한 사진은 다분히 초현실적이다.
눈과 구름, 그 사이 보이는 바위의 질감 등 히말라야의 표면은 기묘하다. 그 장면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자연이 만든 실재를 바라보는 동안 다른 차원이 된다. 더군다나 눈에 보이는 풍경은 찰나일 뿐, 태양과 바람에 따라 곳곳으로 흩어진다. 작가가 눈으로 바라본 기묘한 장면을 순간적으로 채집할 때 느끼는 희열은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빛으로 박제된 사진은 다시 돌아온 일상에서 또 다른 창작의 지표가 되고 있다.
라이프스타일 파트에서 촬영하다가 식재료 사진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2012년 신세계SSG가 론칭을 준비하며 산지 프로젝트를 의뢰해왔어요. 석달 간 전국에 있는 150여개의 업체를 직접 방문해 촬영을 했죠. 산지, 생산자, 식재료를 촬영하면서 그때부터 푸드 전문 사진가라는 시선이 생겼습니다.
식재료를 촬영하던 시간이 지금의 시선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아무리 현장의 생생한 느낌과 감각을 전하려고 해도 그 디테일한 맛, 향, 소리, 촉감 등을 사진으로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그러던 중 사진의 메커니즘적인 발달이 이전과는 다른 질감 표현이 가능해졌고, 그러한 작업 방식을 좋아했습니다.
커머셜 사진 경험은 색의 사용과 구도에 어떤 흔적을 남겼나요?
오랫동안 상업 사진을 촬영하며 몸에 박힌 틀 같은 게 꽤 많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프레이밍 비율이나 수평수직선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요. 그 부분을 벗어나려던 시작이 노르웨이 사진부터였습니다.
<NORWAY>
산을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등산과 트레킹을 하며 많은 산을 사진에 담아왔지만 보통 산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그 부분을 벗어나보고 싶었습니다. 또 그 대상이 산이든 바다든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항상 그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을 계기로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반추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떤 산을 등정했나요?
2022년 우연한 계기로 안나푸르나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가장 인기있는 ABC 트레킹이 첫 시작이었어요. 2023년에는 랑탕 코스를 등정하고, 2024년에는 해발 6,249m에 이르는 미답봉 라르카 피크를 시도해 5400m 캠프까지 갔어요. 이후에는 티벳 유목민이 정착해 있는 네팔 북서부의 어퍼무스탕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모터바이크로 중턱까지 올랐습니다. 올해는 뉴질랜드의 마운틴 쿡에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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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마운틴쿡
고산 지대는 촬영 조건이 쉽지 않아요. 촬영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있나요?
처음에는 오프로드 사륜구동과 오토바이크를 타고 올랐지만, 좀더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전문 등반 교육을 받고, 등반팀에서 경험치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더 깊고 내밀한 자연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가장 매력을 느끼나요?
고산에서 느끼는 감각은 매우 단순합니다. 추위, 배고픔, 고단함,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교차합니다. 그 느낌이 아주 선명하고 뚜렷해서 머릿속에 잡스러운 생각이 들어오기 어려워요. 그럼에도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이 있어요. 하산 후 돌이켜봐야 할 부분이죠.
어떤 표면은 풍경처럼 남고, 어떤 표면은 거의 추상에 가깝습니다.
지금의 결과물이 완성된 최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도 찾고 있고 발견하면서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단계예요. 그 과정이 꽤 즐겁습니다. 단지 도구가 사진일뿐 그 표현 방법은 최대한 다채롭게 실험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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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OW FOREST>
고산이라는 지형이 작업 세계에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다르지 못한 곳은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죠. 시간에도 있고, 경험에도 있어요. 그중 그나마 확실히, 제일 쉽게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저에게는 산인 것 같아요. 인간의 표현 의지를 최소화시키는 대상을 찾다가, 산에 이른 것뿐입니다. 카메라에 담는 피사체가 산일뿐, 그 대상에 사람의 사유를 온전히 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정이 만만하지 않아요. 그만큼 살면서 주어진 많은 일들이 존중되는 기분도 들고요. 산에서는 허락해주는 것만큼 움직이는 것이 정답입니다. 살면서 오만했던 시간과 경험을 반성하게 돼요.
최근 가장 강하게 남은 촬영 장면이 있다면?
강가에 부서진 돌들이 조형성을 갖춘, 완벽한 구도로 놓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군가가 의도한들 그런 구도로 배치하기 무척 어렵거든요. 자연에서 그런 장면을 발견하고 약간의 쾌감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지금 그 돌들은 또 다른 형태가 되었겠지만 제 사진에는 남아 있어요. 수많은 시간 중 가장 완벽해진 단 한 순간의 모습으로.
앞으로 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 대상이 있나요?
고산과 눈에 다가간 만큼 좀더 깊이 바라보고 싶네요. 한편 숲과 정원 작업도 하고 있어요. 훨씬 풍부한 색감과 다른 형태의 이미지들이 채집되고 있어서 기대하는 방향으로 진행 중입니다.
PROFILE
민희기(b.1976)
민희기 사진작가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2002년 디자인하우스에서 잡지 촬영을 시작했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상업 사진을 촬영하며 커리어를 쌓았다. 신세계백화점 SSG 산지 촬영 프로젝트, 풀무원ORGA 리뉴얼 프로젝트, 현대카드 제주올레 프로젝트, 설화수50주년 브랜드북과 플래그십스토어를 위한 4계 촬영을 했다.